2005년이 다가오고 있다. 내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많은 일들과 극복해야 할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해이다. 내년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당하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과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한 지 40년이 된다. 때마침 조·일간에는 수교 협상이 한창이다. 일본 고이즈미 수상은 조·일수교를 1년 안에 마무리 짓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년은 조·일수교 원년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조·일수교는 한·일수교의 판박이로 할 것이 합의된 상태다. 조·일수교 자체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지만, 자칫 북측마저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국교를 정상화 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2005년에 일어날 일은 이 뿐만이 아니다. 2001년 검정 통과되었지만, 채택률에서 참패를 당했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중학교 역사교과서(후쇼사 출간)의 개정판이 다시 검정 통과될 것이 예상된다. 이 교과서가 더 개악되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편으로 일본에서는 평화헌법 개정운동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이미 헌법 개정의 필요성은 정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광범한 공감을 얻은 상황이다. 일본은 이미 자신들의 군국주의화 ·우경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준비가 끝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나 외교부 차원에서는 한일협정 체결 4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양국 우호 증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의 시각에서 더 이상 과거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막아서고 있는 형편이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비밀문서들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2004년 2월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자, 외교부가 즉각 항소를 제기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아직도 숨기고 감출 것이 많은데, 어떻게 바람직한 미래관계가 성립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2005년에 일어날 위와 같은 일들은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모두가 하나로 귀결되고 있다. 모두가 21세기 동아시아 질서 재편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이자, 생존권 차원의 문제는 한(조선)반도를 중심으로 한 평화질서를 구축해 내는 일이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동아시아의 패권경쟁에 뛰어든 지 오래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은 군사대국화와 역사왜곡을 통해 급속한 우경화의 길로 들어섰다. 중국 또한 최근 한(조선)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왜곡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은 다시 조·일수교를 내걸고 한(조선)반도 북부지역에 대한 주도권 싸움에 본격적인 포문을 열었다. 바다 건너 미국도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고 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는 조·미관계의 회복을 공약으로 준비하고 있다. 반인륜적이고 독선적인 이라크 전쟁을 감행한 대가로 국내외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부시는 새로운 돌파구로 북핵문제의 해결과 조·미관계 정상화를 은근슬쩍 흘리고 있다. 이는 한국 내에 점차로 높아지기 시작한 파병철회 여론과 반미정서의 고양을 무마시킬 당근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과정은 미국의 대 한(조선)반도 영향력을 과시하고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동아시아를 둘러싼, 정확하게는 한(조선)반도를 둘러싼 경쟁은 치열하기 그지없다. 그 와중에 배짱편한 것은 오직 당사자 중의 하나인 한국정부밖에 없는 듯하다.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한국 영토 내에 상륙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어도 별 무관심이다. 그들이 침략행위를 미화하다 못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공공연히 외쳐도 미래의 동맹관계만을 강조한다. 파병의 대가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미국 측에 요청하면서도 공개적으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다. 이 모두가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협정 과정에서 보여 진 미국의 압력과, 일본의 오만, 박정희 정부의 조급함 등등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지 못하니 그것의 시정은 불가능하다. 한국정부는 한일협정에서 한(조선)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내세워, 한(조선) 반도에서의 대표성을 일본에 요구했다. 조·일수교를 원천봉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상 북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비뚤어진 인식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조·일수교 과정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조·미수교 과정에서는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참으로 묘한 것은 일본이나 미국문제에 대해선 이렇게 소극적인 정부가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서 역사왜곡을 하자, 그 대책으로 100억 규모(결국 50억 규모로 결정되었지만)의 재단 설립을 국무회의에서 내놓았고 그것을 현실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참에 재단을 동북아 정책을 생산하고 동북아 문제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기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일간 역사왜곡문제가 전 사회적 문제가 된 것만도 벌써 30년이 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엔 변변한 일본연구 재단이 없을까? 일본의 역사왜곡에 총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구 하나 만들 생각을 못했을까? 반면에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은 어디에서 나온 용기일까? 미래관계를 생각하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경제적 이해관계가 결코 적지 않은데 말이다. 그리고 북핵문제를 비롯한 북과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미국에 버금가는 역할을 중국이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한·미·일 동맹이라는 함정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는 근시안 때문이라면 과언일까? |